타당하고 옳은 말인 줄은 잘 알지만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있습니다. 아마츠야는 아모스가 전하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더욱이 남왕국 유다 출신인 그가 북왕국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리라고 외치고 있으니 결코 달갑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아모스도 본인이 자원하여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가서 그런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는 하느님께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 모두가 그 말씀을 환영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던 청중 가운데서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하고 말하면서 많은 이가 예수님 곁을 떠나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말씀은 듣기조차 거북하고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에게 사로잡혀 그분의 말씀을 짊어지고 그분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속해 있는 시대와 사회의 양심 역할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언자들은 힘이 없고 억눌린 사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사람, 자신의 의사마저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늘 기구한 삶을 살다가 비운에 이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언자들의 이러한 신원과 역할 때문에 그들의 삶은 늘 그렇게 고달팠는지도 모릅니다.
아모스도, 예레미야도,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오늘 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와 아마츠야의 경우처럼, 힘 있고 가진 사람의 눈에는 예언자의 외침이 늘 사회의 안정을 해치는, 해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사회의 안녕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기에 그들은 예언자들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사실 지금까지 제거하여 온 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도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시대에 하느님을 대신하여 양심에 호소하는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 말씀에 따라 우리가 먼저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도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용감하게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에페소서의 말씀대로,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하느님의 소유로 속량될 것입니다.
的權利和適當地寫好了,但不想聽到這些話。 或許,阿莫斯,一個信息喜歡聽, 此外,上角標的毀滅性武器,他是在北部的王國,以色列也上升;我從來不愛哭都。 但我才知道的人也Amos自願返回其家園,不熟悉的領土,宣布它的不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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